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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국교 정상화의 이면 – 1965년 협정 다시 보기

by 온기담 2025. 6. 26.

    [ 목차 ]

한일 국교 정상화는 1965년 체결된 한일협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당시 한국 사회는 경제적 이익과 역사적 정의 사이에서 깊은 갈등을 겪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 이면에 숨겨진 갈등과 의미에 대해 다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일 국교 정상화의 이면 – 1965년 협정 다시 보기
한일 국교 정상화의 이면 – 1965년 협정 다시 보기

경제적 필요와 외교 전략의 만남 – 한일협정 체결의 배경

1965년 체결된 한일협정은 일제 강점기 이후 단절된 양국의 외교 관계를 공식적으로 정상화한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단순한 외교 회복을 넘어선, 국제 정세와 경제적 필요, 정치적 계산이 얽힌 복잡한 배경이 존재하였습니다.

한국은 1945년 해방 이후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수립하지 않았으며,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한 법적·도덕적 책임을 명확히 규명하는 것이 독립국가로서의 주권 확립과 직결된 사안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해방 이후 미군정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국내 정치와 사회는 안정되지 못하였고, 자립 경제의 토대도 매우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특히 1961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부는 국가 경제를 살리기 위한 현실적인 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적극 추진하게 됩니다.

당시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산업화를 본격화하고 있었으나, 이를 뒷받침할 외화 유입과 기술 도입이 절실하였습니다. 미국의 원조는 점차 축소되는 흐름이었고, 국제 금융시장에서 신용도 낮은 한국으로서는 외자 유치가 여의치 않았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박정희 정권은 일본으로부터 경제 협력을 받아 경제 성장을 촉진하려는 전략을 세우게 됩니다.

동시에 미국은 냉전 체제 아래 동북아의 안정을 위해 한일 양국의 관계 개선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습니다. 한미일 삼각 안보 체제를 구축하려던 미국은 한국과 일본이 갈등보다는 협력을 통해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을 견제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미국의 입장은 한일 협정 추진에 중요한 외교적 동인이 되었습니다.

일본 역시 한국과의 국교 정상화를 통해 식민지배에 대한 국제적 책임에서 벗어나고, 전후 복귀를 위한 외교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의도가 강했습니다. 이에 따라 일본은 한국에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총 5억 달러 규모의 경제 협력을 약속하였고, 기술 이전과 일본 기업의 한국 진출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 자금은 철강산업, 발전소 건설, 경부고속도로 등 국가 기간 산업 육성에 크게 기여하며 한국 산업화의 자본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이득 뒤에는 치열한 외교적 협상이 존재하였으며, 그 중심에는 과거사 문제에 대한 입장 차이가 놓여 있었습니다. 특히 강제징용, 위안부, 식민지배의 불법성 인정 문제 등은 한일 양국 간 가장 민감한 쟁점이었습니다. 한국 측은 일본의 법적 배상과 식민지배의 불법성 인정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식민 지배는 합법적이었으며 배상보다는 ‘경제 협력’의 형태로 문제를 종결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결국 박정희 정부는 이러한 차이를 넘지 못하고, 실질적인 경제 지원을 얻는 방향으로 외교적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이는 정권의 정당성과 경제성장의 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지만, 동시에 국민적 감정과 피해자 개인의 권리를 배제한 타협이라는 비판을 낳게 됩니다.

이렇게 1965년 6월 22일 체결된 한일기본조약과 함께 청구권 협정, 재산 및 청구권 문제에 관한 협정, 문화재 및 문화 협력 협정 등 총 14개의 문서가 동시에 체결되었으며, 이를 통해 양국은 공식적으로 외교 관계를 수립하게 되었습니다.

이 협정은 한국의 산업화 기반을 마련한 역사적 전환점이었지만, 동시에 식민지배에 대한 일본의 사과와 책임 규명 없이 국교 정상화를 단행했다는 점에서 이후 수십 년간 한일 관계의 근본적인 불신과 갈등의 뿌리를 남기게 된 사건이기도 합니다.

 

민심과 괴리된 외교 – 국민적 반발과 정당성 논란

1965년 한일협정은 박정희 정부가 외교적 결단이라며 강행한 정책이었지만, 국내에서는 심각한 민심 이반과 격렬한 사회적 반발을 초래하였습니다. 정부는 한일협정을 통해 경제협력 자금을 확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산업화와 국가 재건을 도모하겠다는 논리를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다수의 국민들은 이 협정이 식민지배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면제해주는 굴욕적 조치라고 받아들였으며, 특히 피해 당사자와 유족들, 그리고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지식인 사회는 협정 체결 자체에 대한 정당성을 강하게 문제 삼았습니다.

당시 국민이 가장 분노한 지점은 일제 강점기의 불법성과 그에 따른 피해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와 법적 배상 없이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는 절차였습니다. 일본은 식민지 지배가 국제법상 합법이었으며, 이미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입장을 고수하였고, 이에 대해 한국 국민은 국가적 모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특히 강제징용, 위안부, 일본군에 의한 학살과 수탈 등 일제의 만행에 대한 책임 문제가 무시된 채 협상이 마무리된 점은 대중적 분노를 자극하였습니다.

국회에서도 협정 비준은 뜨거운 쟁점이었습니다. 당시 야당과 시민사회는 협정문에 포함된 ‘청구권 문제 완전 종결’이라는 문구가 향후 국민 개인의 권리까지 소멸시키는 것 아니냐는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실제로 박정희 정부는 일본으로부터 받은 자금을 국민 개개인에게 직접 배분하지 않고,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전력 인프라, 교육·농업 발전 등에 사용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국가 경제는 성장했지만, 일제 피해자 개인의 고통은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 채 외면당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국민적 반발은 거리에서 직접 표출되었습니다. 전국의 대학생과 청년들은 정부의 졸속 외교를 규탄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는 ‘굴욕 외교 반대’, ‘한일협정 철회’라는 구호가 울려 퍼졌습니다. 이러한 시위는 4·19혁명 이후 가장 거센 민중 저항 중 하나로 평가되며, 단순한 외교 반대 운동을 넘어 박정희 정권의 정당성과 권위주의 통치 방식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반영한 움직임이었습니다.

이 시위는 군사정권 하에서도 전국적으로 확산될 만큼 사회적 파장이 컸으며, 당시 경찰과 군부의 강경 진압으로 인해 부상자와 구속자가 속출하였습니다. 언론은 통제되었고 정부는 국민 여론을 ‘좌익 선동’으로 몰아가며 시위의 정당성을 깎으려 하였으나, 이미 민심은 정부를 신뢰하지 않게 된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정부가 국민과의 소통 없이 일방적으로 협정을 추진한 데서 비롯된 결과이며, 국가 권력이 민의를 무시한 대가로도 해석됩니다.

게다가 한일협정 체결 이후에도 일본 정부는 피해자와 한국 사회의 상처를 치유하기보다는 오히려 역사 왜곡과 책임 회피로 감정을 자극했습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는 오랫동안 부인과 침묵으로 일관했으며, 일본 내 교과서에서는 일제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이 축소되거나 왜곡되었고, 이는 양국 간 갈등을 더욱 증폭시켰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태도는 협정 체결 이후에도 진정한 화해가 아닌, 갈등의 연속선을 낳게 되는 주요 요인이 되었습니다.

결국 1965년 한일협정은 한국 정부가 경제 발전이라는 명분으로 국민의 상처와 역사적 정의를 외면한 대표적인 사례로 기억됩니다. 국익을 위한다는 미명 아래 국민적 동의 없이 진행된 협정은 외교 정책의 정당성과 민주적 정당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임을 역설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국민과 괴리된 외교는 잠재된 갈등을 오히려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이후 수십 년 동안 한일 관계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뿌리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재조명 – 외교의 본질과 역사 정의의 과제

1965년 한일협정 체결 이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이 협정을 어떻게 평가하고 재조명할 것인지는 여전히 뜨거운 사회적, 정치적 논쟁의 대상입니다. 당시 협정은 경제 발전을 위한 현실적인 선택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이면에 존재한 역사적 왜곡과 피해자 무시는 사회적으로 깊은 상처로 남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한일협정을 단지 과거의 외교 문서로만 간주할 수 없으며, 그 안에 담긴 외교의 본질과 역사 정의의 문제를 함께 성찰해야 할 시점에 와 있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나 기업을 상대로 직접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 한일협정의 법적 의미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다시 촉발시키고 있습니다. 2018년 한국 대법원은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손해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으며, 이는 한일 간 외교 관계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판결의 핵심은 국가 간 협정으로 인해 개인의 권리까지 자동적으로 소멸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점에 있습니다. 반면 일본은 1965년 협정을 통해 "모든 청구권 문제는 완전히 정리되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으며, 이는 현재까지도 외교적 갈등의 핵심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법적·외교적 충돌은 단지 과거 문제에 대한 입장 차이로만 볼 수 없습니다. 이는 외교의 본질, 즉 국가 간 협상에서 누구를 대표하고 어떤 가치를 우선시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과거 박정희 정부는 국가 경제를 일으키기 위한 현실적 계산 아래 한일협정을 체결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실제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배제되었고, 이로 인해 ‘밀실 외교’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외교는 단순히 국가 간 타협이 아닌, 국민 개개인의 권리와 인권, 기억까지 포괄하는 복합적인 과정이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외교 정책의 방향성 자체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경제 논리만으로 접근했던 과거의 외교와 달리, 현재의 국제사회는 인권, 역사 인식, 피해자 존엄을 중시하는 흐름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적 가치 변화에 부응하지 못하는 외교는 결국 신뢰를 잃고, 더 큰 갈등을 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한일협정은 과거 한 시점에서 끝난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의 외교와 정책 결정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살아 있는 역사로 봐야 합니다.

진정한 화해와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를 위해서는 양국 모두 과거를 정면으로 마주보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일본은 더 이상 법적 책임을 회피하거나 과거를 축소하려 해서는 안 되며, 한국 역시 피해자 중심의 접근을 통해 신중하면서도 원칙 있는 외교를 전개해야 합니다. 특히 위안부 문제처럼 감정과 인권이 결합된 사안은 경제적 이해만으로 풀 수 없는 문제이며, 진정성 있는 사과와 역사적 인정만이 해법이 될 수 있습니다.

한일협정은 분명 경제발전의 계기를 마련한 외교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수많은 역사적 상처와 미완의 정의가 존재합니다. 우리는 이 협정을 다시 바라보며, 당대의 선택이 현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그리고 앞으로 외교에서 어떤 기준과 가치가 우선되어야 하는지를 냉정하게 되짚어야 합니다. 그 과정은 더 나은 외교, 더 성숙한 민주주의를 향한 중요한 단계가 될 것입니다.

결국 과거를 성찰하는 일은 미래를 준비하는 작업입니다. 한일협정은 단순한 과거의 조약이 아니라, 외교와 정의가 충돌할 때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지속적인 고민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역사와 국민 앞에 진정으로 책임 있는 외교의 자세일 것입니다.

 

1965년 한일협정은 외교 정상화와 경제 발전의 출발점이었지만, 역사적 정의와 국민 감정을 외면한 불완전한 타협이기도 했습니다. 경제적 필요와 외교 전략은 분명 당시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지만, 피해자 중심의 정의 실현은 배제된 채 진행되었습니다.
이제는 그 과거를 다시 들여다보고, 화해와 협력의 길 위에서 정의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외교는 단순한 협상이 아니라, 국민과 함께하는 진실한 과정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