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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통령 제도의 변화사 – 직선제까지의 길

by 온기담 2025. 6. 28.

    [ 목차 ]

대한민국의 대통령제는 헌법의 변화와 정치적 격동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바뀌어 왔습니다. 오늘은 대통령직선제가 자리 잡기까지의 과정을 중심으로, 제도의 역사적 변화 흐름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대한민국 대통령 제도의 변화사 – 직선제까지의 길
대한민국 대통령 제도의 변화사 – 직선제까지의 길

제헌 헌법과 간접선거의 시작

1948년 7월, 대한민국은 제헌 국회를 통해 최초의 헌법을 제정하고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하였습니다. 제헌 헌법은 권력의 분산과 견제를 목적으로 삼권분립 원칙을 도입하였으며,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국가를 대표하는 지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방식은 아니었고, 당시 구성된 단원제 국회가 간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는 구조였습니다. 이는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 국가의 기틀을 다지기 위한 현실적인 선택이었습니다.

1948년 7월 20일, 제헌 국회의 투표를 통해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됩니다. 그는 독립운동 경력과 국제적 인지도를 바탕으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취임하였으나, 대통령 취임 이후 권력 강화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며 정치적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1952년에 단행된 '발췌 개헌'입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재선을 위해 대통령 선출 방식을 국민 직접선거로 바꾸는 개헌을 시도하였으며, 국회 내 반대 여론이 거세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경을 동원해 개헌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이 과정은 헌정사에 있어 군사력을 동원한 강제적 입법의 전형으로 기록되며, 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한 대표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

이후 1954년에는 '사사오입 개헌'이라는 또 다른 논란이 발생합니다. 이 개헌안은 대통령의 3선 제한을 폐지하여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가능하게 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개헌 정족수에는 미달하였으나, 정부는 전체 표를 기준으로 하지 않고 유효표만을 계산하는 방식으로 정족수를 충족시켰다고 주장하며 개헌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이는 법적 논란을 낳았고, 국민적 불신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1950년대의 대통령 선거 제도는 형식적으로는 간접선거에서 직접선거로의 발전처럼 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민주주의 제도의 악용과 권력 집중의 수단으로 활용되었습니다. 특히 개헌 과정에서의 절차적 정당성이 무시되고,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국정을 운영하려는 시도는 향후 대한민국 정치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결국 이 시기의 대통령제는 권력자의 의지에 따라 유연하게 조작될 수 있는 제도에 불과하였고, 국민의 정치적 의사는 제도 내에 온전히 반영되지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치문화는 이후 군사정변과 유신체제로 이어지면서, 민주적 대통령 선출 제도가 뿌리내리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승만 정부의 집권 말기에는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으로 이어지는 시민 저항이 발생하면서, 결국 권력의 정당성은 국민의 손에 있다는 교훈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제도의 불안정과 권력 남용의 역사적 경험은 훗날 대통령 직선제의 필요성과 국민 주권 실현이라는 명제에 더욱 힘을 실어주는 기반이 되었으며, 이후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중요한 자양분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유신헌법과 통일주체국민회의 – 권력 집중의 극단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 군부 세력은 쿠데타를 통해 이승만 정권 이후 혼란을 겪던 한국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를 통해 군정을 실시하다가, 1963년 대통령 선거를 통해 민간 정부를 수립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하였지만, 박정희의 권력 장악은 갈수록 공고해졌고,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억압, 언론 통제, 야당 탄압은 지속되었습니다. 특히 박정희 정부는 3선 개헌을 통해 장기집권의 길을 열었고, 1971년 세 번째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며 정권을 연장합니다.

하지만 당시 국내외 정세는 그에게 또 다른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베트남 전쟁의 종결과 함께 냉전 구도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국내에서는 민주화 요구가 확산되던 시점이었습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박정희 정권은 1972년,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는 동시에 ‘10월 유신’을 단행하여 헌법을 전면 개정합니다. 이로 탄생한 유신헌법은 대통령의 권한을 전례 없이 확대하며, 사실상 대통령 1인에게 모든 국가 권력이 집중되는 헌정사상 유례없는 체제를 만들어냅니다.

유신헌법의 가장 큰 특징은 대통령 선출 방식의 변화였습니다. 기존의 국민 직접선거 제도는 폐지되고,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간접선출 기관이 신설되었습니다. 이 기구는 대통령이 사실상 후보자와 구성원 모두에 대해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구조였으며, 따라서 선출 과정은 형식적일 뿐 실질적인 국민 의사 반영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유신헌법은 또한 대통령의 임기를 6년으로 늘리는 동시에 중임 제한을 폐지하여 박정희 대통령이 무제한으로 재임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은 긴급조치권과 국회 해산권, 헌법 개정 발의권, 계엄령 선포권 등 입법·사법·행정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되어 ‘초헌법적 존재’로 군림하게 됩니다.

유신체제 하에서의 국가 운영은 사실상 독재체제와 다름없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통치 전반에 걸쳐 반대 세력에 대한 강력한 통제를 유지하였고, 학생운동, 재야인사, 언론 등에 대한 탄압은 일상화되었습니다. 긴급조치 1호부터 9호까지 이어지는 대통령의 일방적 명령은 법률보다 우위에 있었으며, 이를 어긴 국민은 사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고 중형에 처해졌습니다. 이처럼 유신헌법은 민주주의와 국민주권 원칙을 근본부터 부정하는 제도였으며, 박정희 정권의 권위주의를 제도적으로 정당화하는 수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국민의 저항은 거세졌고, 정치적 불만은 극에 달하게 됩니다. 1979년, 부마항쟁을 계기로 유신 정권의 균열이 가시화되었으며, 결국 같은 해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격에 의해 사망하게 됩니다. 이로써 유신체제는 종말을 맞지만, 뒤이은 12·12 군사반란과 5·17 쿠데타를 통해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다시 정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전두환 정권은 1980년, 제5공화국 헌법을 통해 대통령 간접선거제를 유지하면서 권력 유지를 시도하였습니다. 이때 대통령은 ‘대통령선거인단’이라는 기구를 통해 선출되었으며, 국민은 단지 선거인단을 뽑는 데에만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선거인단의 구성부터 결과까지 정부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하였기 때문에, 사실상 정권의 정통성과 민주적 정당성은 끊임없는 의문을 제기받게 되었습니다.

결국 유신헌법과 전두환 정권의 간접선거제도는 헌정 질서를 형해화하고, 대통령제를 권력 독점의 수단으로 전락시킨 대표적인 사례였습니다. 국민의 직접적인 정치 참여는 철저히 제한되었고, 민주주의는 제도 속에서 이름만 남아 있는 껍데기와 같은 상태로 전락하였습니다. 이러한 체제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통해 결국 종식되며, 국민의 손으로 대통령을 다시 직접 선출하는 제도의 복원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6월 항쟁과 대통령직선제의 부활

1987년은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큰 전환점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전두환 정권은 1980년 군부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이후,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제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국민 사이에서는 군사정권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고조되었고, 권위주의 통치에 대한 반감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1987년 1월,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경찰 조사를 받던 중 고문으로 인해 사망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잠재되어 있던 민심의 분노가 폭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정부는 이를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식으로 은폐하려 하였으나, 언론과 시민사회는 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며 진상 규명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어 6월 대학생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중태에 빠진 연세대생 이한열이 사망하자, 국민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고, 마침내 전국적인 대규모 민주화 운동으로 번져나갔습니다. 이른바 ‘6월 항쟁’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에서 수백만 명의 시민이 참여한 초유의 비폭력 저항운동이었으며, 민주주의 회복을 향한 국민의 의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6월 항쟁의 핵심 요구는 대통령직선제 도입이었습니다. 시민들은 군사정권이 주도하는 간접선거에 대해 전면적인 거부 의사를 밝혔으며, 정치개혁과 권력기관 개혁, 기본권 보장 등 민주적 헌정질서의 회복을 외쳤습니다. 이러한 국민적 압력은 정부와 여당 내부의 균열을 낳았고, 결국 1987년 6월 29일 당시 민정당의 대선 후보였던 노태우는 대국민 담화를 통해 ‘6·29 선언’을 발표하게 됩니다. 이 선언은 대통령직선제 수용, 김대중의 사면복권, 시국사범 석방 등 정치개혁안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이는 사실상 정권 차원의 항복 선언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뒤이어 같은 해 10월, 헌법 개정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제9차 개헌안이 통과되었고, 대한민국은 다시 한 번 대통령 직선제를 회복하게 됩니다. 개정된 헌법에서는 대통령 임기를 5년 단임제로 규정하여 장기집권을 방지하였고, 국회의 권한 강화, 헌법재판소 설치, 인권 보장 조항의 신설 등 국민주권과 민주주의 원칙을 제도적으로 보완하였습니다. 이 헌법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현행 헌법의 틀을 제공하였으며, 제6공화국의 시작을 공식화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1987년 12월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는 16년 만의 직선제 대통령 선거였습니다. 국민들은 오랜 기다림 끝에 직접 투표로 국가 지도자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고, 비록 야권 분열로 인해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선거 과정은 비교적 공정하고 투명하게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큽니다. 당시 야권 후보였던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은 단일화에 실패하였지만, 이 선거를 통해 정치권의 경쟁 구도와 정당 정치가 활성화되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이후 대한민국은 정기적인 대통령 선거를 통해 권력 교체가 이루어지는 민주주의 국가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대통령직선제는 국민의 정치적 의사를 직접 반영하는 핵심적인 제도로서 기능하였으며, 각 정당은 민심에 부합하는 정책을 제시하기 위한 경쟁에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변화가 위로부터가 아닌 아래로부터, 즉 시민들의 조직된 힘과 의지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입니다.

6월 항쟁은 단지 제도 하나를 바꾸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실질적인 출발점이자, 국민이 정치의 주체로서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다는 자각의 상징이었습니다. 그 이후 대한민국은 권위주의를 벗어나 점진적으로 자유와 인권,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실현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직선제의 부활은 민주주의 발전의 출발점이자, 헌정사에 길이 남을 국민 주권 실현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제는 처음부터 민주적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간접선거, 유신헌법, 군부 통치 등 권력 집중과 국민 무시의 시기를 거치며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국민은 권위주의를 거부하고 거리로 나섰으며, 결국 1987년 직선제 개헌을 통해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을 수 있는 오늘의 제도를 만들어냈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역사 속에는 민주주의를 향한 수많은 시민의 헌신과 희생이 존재합니다. 대통령직선제는 단지 제도상의 변화가 아니라, 국민이 국가의 주인임을 실질적으로 증명한 결과였습니다. 앞으로도 이 제도가 건강하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깨어 있는 시민의 지속적인 관심과 참여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