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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항쟁에서 10.26까지 – 박정희 정권의 마지막 순간

by 온기담 2025. 7. 1.

    [ 목차 ]

부마항쟁과 10.26 사건은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상징하는 역사적 전환점입니다. 이 글에서는 유신체제의 균열부터 시민 저항,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의 최후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부마항쟁에서 10.26까지 – 박정희 정권의 마지막 순간
부마항쟁에서 10.26까지 – 박정희 정권의 마지막 순간

유신체제의 균열, 쌓여가는 민심의 분노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뒤, 유신헌법을 공포하며 제4공화국의 막을 올렸습니다. 유신헌법은 대통령에게 행정·입법·사법을 초월한 절대권력을 부여하는 헌법으로, 3선 연임 제한을 철폐하고 간선제로 대통령을 뽑도록 하여 사실상 종신 집권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대통령이 국회의원 3분의 1을 지명할 수 있도록 한 조항은 삼권분립의 원칙을 무력화시킨 상징적인 사례였습니다. 대통령이 국회 해산권과 비상조치권을 갖는 구조는 권력의 견제와 균형을 완전히 무력화시켰으며,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억압은 날이 갈수록 강화되었습니다.

유신체제는 “안보 위기 극복과 조국 근대화”라는 명분으로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비판 여론을 봉쇄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습니다. 당시 정부는 경제 개발의 성과를 앞세우며 체제의 정당성을 강조했지만, 그 이면에는 언론 탄압, 비판 세력 탄압, 사상 검열, 긴급조치 발동 등 철저한 통제정치가 있었습니다. 신문과 방송은 정부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통로로 전락했고, 반정부적 성격의 기사나 논평은 아예 다뤄지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억압적 분위기 속에서도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은 암암리에 유신체제의 문제를 비판하고, 민주주의의 회복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197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유신체제는 외부적인 도전에 직면하게 됩니다.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악화된 경제 상황이었습니다. 제2차 석유 파동, 고물가, 무역수지 적자 등으로 인해 경제 성장이 정체되고, 노동자·서민층의 생활은 갈수록 팍팍해졌습니다. 실업률이 높아지고 생필품 가격이 급등하면서 서민들의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고, 박정희 정권에 대한 신뢰도는 점차 하락했습니다. 특히 대기업 중심의 성장 전략이 소수에게만 부를 안겨주며 빈부 격차가 심화된 것도 민심 이반의 한 요인이었습니다.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불만이 결합되며 1978년 총선에서는 야당인 신민당이 더 많은 득표를 얻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유신체제의 특성상 이는 정치적 변화를 이끌지 못했고, 국민들의 좌절감과 분노만 가중되었습니다. 이 시기부터 각 대학에서는 유신 철폐를 외치는 시위가 확산되었고, 노동 현장에서는 조직적 파업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와이에이치무역 여성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 사건과 이에 대한 경찰의 폭력 진압은 대중의 분노를 크게 자극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979년 10월, 드디어 민중의 분노가 임계점에 다다르게 됩니다. 바로 부산과 마산에서 벌어진 대규모 시민 봉기, 즉 부마항쟁이 그것입니다. 학생과 시민들이 함께 거리로 나와 유신 철폐를 외치며 정권에 저항하는 모습은 그간 누적된 국민들의 정치적 분노와 사회적 좌절이 집단적으로 표출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유신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한 진짜 균열은 이 순간부터 본격화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마항쟁, 억눌린 민중의 분노가 터지다

1979년 10월 16일, 부산 경성대학교 학생들이 교내에서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교문 밖으로 진출한 사건은 단순한 대학 시위를 넘어 유신 정권에 대한 대중적 저항의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이 시위는 순식간에 부산대학교, 동아대학교 등 인근 주요 대학들로 확산되었고, 이후 일반 시민들까지 시위 대열에 동참하면서 전면적인 민중 항쟁으로 번졌습니다. 당시 부산 시내에는 수천 명의 시위대가 운집하여 거리행진을 벌였고, 시내 중심가에서는 경찰과 시위대 간의 격렬한 충돌이 벌어졌습니다.

부산 시민들은 단순히 구호를 외치는 수준을 넘어, 언론 왜곡의 상징이었던 방송국에 항의하고, 억압의 상징이었던 경찰서와 공공기관에 대해 거센 분노를 표출했습니다. 특히 시민들은 평소 정부 발표만을 보도하던 신문사를 항의 방문하거나 인쇄소를 점거하여 유인물을 제작·배포하는 등, 보다 적극적인 저항 행위를 벌였습니다. 시위가 점차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양상을 띠자, 경찰의 대응은 과잉 진압으로 변질되었고, 곤봉과 최루탄, 폭력적인 연행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의 참여는 오히려 더 늘어났고, 이는 기존의 질서가 더는 유효하지 않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현상이었습니다.

정부는 사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10월 18일 부산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습니다. 비상계엄은 곧바로 군부대의 투입으로 이어졌고, 전차와 장갑차까지 등장하면서 도시는 사실상 전시 상태로 전환되었습니다. 수많은 시민이 체포되고 부상자와 희생자가 속출했으며, 체포된 이들은 군부대에 구금되어 가혹한 조사를 받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 중 일부는 계엄군의 실탄 발사로 인해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부산 시민들의 저항은 쉽게 꺾이지 않았고, 시위는 마산으로 이어졌습니다.

10월 18일, 마산지역 대학생들이 유신 반대 집회를 열면서 부마항쟁의 두 번째 물결이 시작되었습니다. 마산은 이미 1960년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의 역사적 경험을 가진 도시였기에 시민들의 정치의식이 높았고, 학생들의 외침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시민들이 빠르게 늘어났습니다. 마산시청 앞 광장을 중심으로 수천 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 “독재 타도”, “민주 회복”을 외치며 시내 곳곳을 행진했고, 이 과정에서 마산상공회의소, 교육청, 지방법원, 경찰서 등의 공공기관이 항의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건물 방화나 차량 파손 등 격렬한 충돌도 벌어졌습니다.

정부는 마산에서도 계엄령을 확대 적용하고, 군 병력을 투입해 시위를 강경 진압하였습니다. 마산에서는 특히 고등학생까지 시위에 동참하면서 경찰의 연행 대상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게 되었고, 심지어 어린 학생들까지 구금되어 조사를 받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러한 강압적인 진압은 오히려 시민들의 반발을 더 키우는 결과를 낳았으며, 전국적으로도 유신체제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부마항쟁은 비록 부산과 마산이라는 두 도시에 국한된 사건처럼 보였지만, 그 파장은 전국적으로 엄청났습니다. 무엇보다 박정희 정권 내부에서도 위기의식이 심화되었으며, 기존의 강경 대응 노선에 대한 내부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는 부마항쟁의 민심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이후 벌어질 10.26 사건의 결정적 심리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부마항쟁은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심판이자, 박정희 정권의 말로를 재촉한 분수령이 되었던 것입니다.

 

10.26 사건, 독재의 종말을 알리다

부마항쟁 이후 대한민국 정국은 겉잡을 수 없이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유신체제를 유지해온 박정희 정권은 민중의 저항 앞에서 정치적 정당성과 통치 기반에 큰 타격을 입었고, 그 여파는 단지 거리의 시위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정권 내부, 특히 대통령의 핵심 측근들 사이에서도 위기감이 확산되었습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는 부마항쟁의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유신체제의 한계와 위태로운 정국 운영에 대한 회의감을 깊이 갖게 되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여전히 강경 노선을 고수하려 했습니다. 학생과 시민들의 저항을 불순세력의 선동으로 치부하며, 더욱 철저한 감시와 통제로 사태를 진압하려는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특히 경호실장 차지철은 대통령에게 더욱 강한 무력 진압과 체제 유지에 대한 전략을 권유했으며, 이런 분위기 속에서 김재규와 차지철 사이의 갈등은 점점 격화되었습니다. 김재규는 중앙정보부의 수장으로서 국민의 민심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감지할 수 있었고, 그가 보기에 유신체제는 이미 한계에 도달한 상태였습니다.

결정적인 사건은 1979년 10월 26일 밤 서울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발생했습니다. 이날은 박정희 대통령과 김재규, 차지철, 당시 일부 장군들과 참모들이 참석한 비공식 만찬 자리였습니다. 자리에서 차지철은 시종일관 유신체제의 정당성과 군사적 대응을 강조하며 박정희 대통령에게 아첨성 발언을 이어갔고, 김재규는 이러한 분위기에 강한 불쾌감을 느꼈습니다. 김재규는 이미 여러 차례 대통령에게 정국 전환을 건의했으나 묵살당했고, 이날 또한 현실을 외면한 채 강경책만 주장하는 대통령의 모습에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김재규는 만찬 도중 안가 내 집무실로 들어가 권총을 챙긴 뒤 돌아와 먼저 차지철을 향해 총을 발사하고, 이어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이 총격으로 두 사람은 현장에서 사망하였으며, 이 충격적인 사건은 곧 ‘10.26 사태’로 명명되어 전국을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18년 동안 대한민국을 통치한 권력자였고, 그의 죽음은 단순한 개인의 피격이 아니라 체제 전체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사건 직후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고, 군부는 전국에 비상계엄을 확대 선포하여 치안 유지를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의 종말’이라는 인식이 퍼졌고,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여론이 확고해졌습니다. 학생운동과 재야세력은 박정희 사망 이후의 민주화 전환을 강력히 요구하기 시작했으며, 언론과 사회 전반에도 서서히 변화의 기운이 감돌았습니다.

김재규는 사건 직후 스스로 대통령 시해를 인정하며 체포되었고, 이후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자신의 행동이 단순한 개인적 원한이나 권력투쟁이 아닌,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결단이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였고, 결국 1980년 5월 24일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김재규의 행동에 대한 평가는 지금까지도 분분하지만, 그가 내부 인물로서 체제 붕괴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은 역사적으로 분명한 사실입니다.

10.26 사건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극적인 권력 붕괴의 순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박정희 개인의 죽음이자 유신독재 체제의 종말이었으며, 이후의 ‘서울의 봄’, 5.18 민주화운동,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 등으로 이어지는 민주주의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이 보여준 교훈이 권력의 집중과 독선이 어떻게 내부로부터의 붕괴를 초래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부마항쟁과 10.26 사건은 박정희 정권의 마지막을 장식한 결정적인 두 사건으로,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주의 회복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억눌렸던 민중의 분노는 거대한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고, 결국 정권 내부에서도 스스로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이 글을 통해 유신체제의 붕괴 과정을 되짚어보며, 권력의 집중이 가져오는 위험성과 국민의 저항이 만들어내는 변화의 가능성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역사의 전환점은 우연이 아닌, 축적된 민심과 시대의 요구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